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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다 』/전시 및 알림

박준구 無極 - 然 展 (뮤움닷컴 스크랩)

by 流河 2011. 7. 5.


無極 - 然 展
 
박준구展 / Park Jun-Goo / 朴俊求
2011_0525 ▶ 2011_0531
 

초대일시: 2011년 05월 25일 수요일 오후6시
관람시간: 오전 10시 00분 ~ 오후 6시 00분
일요일 휴관
입장료: 없음
노송 갤러리 (440-715) 경기 수원시 장안구 조원동 장안구청 장안구민회관 Tel. 031-240-3000 www.jacc.or.kr
 
 
 
    박준구 無極 - 然 展
       ― 自然과 人間의 相應的 交感

 왜 소나무 인간인가? 박준구가 보여 주고자하는 예술세계에서 인간형상의 소나무, 혹은 인간과 소나무가 한 몸이 되어 어우러지는 다소 어색해 보일 수도 있는 저 자태는 무엇이란 말인가? 이 해법의 실마리는 그의 예전 작업들을 뒤적이다보면 조금은 수긍이 갈 문제일 것이다.

 90년대 초반부터 두드러지게 표출되는 그의 작업들은 소위 인간과 자연 ― 동양적 天地, 우주, 박준구 회화의 명제에서 등장하는 無極이란 개념과도 유사하다. ― 에 대한 탐구에서부터 시작 된다. 어찌 보면 그의 작품 속에서 표현되는 소재나 주제는 사각의 틀(알, 현실세계, 부조리 등)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는 인체를 형상화함으로써 인간이 새로운 자각(自覺)의 경지에 이르기 위한 갈망과 절규로 부터 촉발된다고 볼 수 있겠다. 그 후 재료적이나 기법적으로나 많은 실험과 연구가 연계 지속되지만 결국 인간과 자연과의 조화로운 상생의 교감이란 난해한 과제는 흡족히 해갈되지 않았는가? 그래서 스스로 자연이 되고자 하는 의지의 표명인가? 아니면 아예 스스로 神이 되어 버린 것일까? 근작들에서 보여준 이미지는 어찌 보면 신으로 여겨 질 수도 있는 군더더기 없이 완벽한 인체형상과, 소나무로 대변되는 자연의 형체가 낯설게 한 화면에서 조우하고 있다.

박준구 / 無極 - 然 / oil on canvas / 81x122cm / 2008 / 개인소장

 물론 이 같은 풍경은 그리 엉뚱하지만은 않다. 그리스로마 신화에서도 언뜻 언급되었던 설화도 있고, 요즘 우후죽순처럼 유행하는 온라인 게임에서 유사한 캐릭터를 한번쯤 만나 봄직도 하다. 나무 요정이나 신적인 존재일 수도 있는 노릇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렇게 겉모습으로 드러나는 이미지만으로 작가의 작업을 판단한다면 많은 아쉬움이 있지 않겠는가? 또한 그의 일련의 작업들을 파노라마처럼 펼쳐 놓고 본다면, 어딘가에서 차용한 이미지라고 보다는 변화의 한 축에서의 자연스런 회화적 구현일 것이다.

 20여 년 동안 그가 일관되게 의문을 던지고 고뇌하며, 한 올 한 올 실타래를 풀어 퍼즐을 짜 맞추듯 추구해 온 예술적 감수성은 위의 몇 마디로 요약하기는 다소 미안함 마저 든다. 그의 논문에서 언급되는 수많은 노장철학의 직유 및 은유를 차치하더라도 아래의 글들을 차근히 음미해 보자면, 그의 예술관의 일부분이나마 훔쳐 볼 수 있는 단서가 될 것 같다.

『 (전략) 내가 꽃이라고 인지하고 命名했기 때문에 그 꽃이, 꽃이 되는 것이 아니라, 꽃이 있기에 내가 꽃인 것을 인지할 수 있듯이, 꽃이 있는 한 그리고 삶이 있는 한, 우리는 그 꽃을 감상하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며, 그 삶을 살아갈 것이다. 현대미술은 지나치리만치 꽃을 찾아 헤매며 그 꽃에 이름 짓기에 급급하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박준구 / 無極 - 然 / oil on canvas / 53x65.1cm / 2008 / 개인소장

박준구 / 無極 - 然 / oil on canvas / 91x117cm / 2009 / 개인소장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다.

산은 물이고 물은 산이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어느 선객(禪客)의 이 네 구절은 우리에게 커다란 사색의 삼매경(三昧境)에 빠지게 하는 의미심장한 문구로서 절대적인 자유의 정신을 추구해 가는 인간성취의 과정을 표상한다고 할 수 있겠다. 즉 북녘바다의 곤(鯤)이라는 물고기가 대붕(大鵬)으로 화하여 남녘 바다로 다시 날아간다는 [莊子] 소요유(逍遙遊)편의 비유 ―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바로 생리적인 감각으로부터 이성적인 사유로, 거기서 다시 정신적인 소요의 예술적 경지로 상승해 가는 과정이다. 다시 말하면 알에서 물고기로 발전하는 것은 생리적인 감각의 수준에서 이성적인 사유로의 승화를 의미하고, 다시 물고기에서 새로 화하는 것은 단순한 이성적인 사유를 거쳐 더 상위적 개념의 무궁한 경지에 이르러 이를 마음껏 향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환상적인 세계에 안주하지 않고, 다시 아득한 현세간으로 회귀하여 이곳에서 큰 깨닳음의 뜻을 구현한다는 현실의 대 긍정적 전환을 의미한다. ― 와 소통한다고 하겠다.

박준구 / 無極 -流 / Oil on canvas / 116.8x72.7cm / 2009 / 개인소장

박준구 / 無極 -流 / Oil on canvas / 116.8x72.7cm / 2011 / 개인소장

 인간이 의식을 가지게 되었을 때 그 의식은 자기의 자발성에 의하여 얻은 것이 아니라 기존의 관습과 타성의 틀에 의하여 틀 지어 진 것이었으며, 그때 보인 산과 들은 소박한 모습 그대로의 산과 물이었다(소박실재론의 단계), 그러나 인간은 문제 상황 속에서 자발적 의식을 갖게 되고 그러한 의식 속에서 어떤 아포리아(aporia :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용어로 ‘길이 없다’는 뜻)에 봉착했을 때 이미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었다. 여기서 인간의 비극은 시작되고 인간의 탐구는 시작한다. 이러한 탐구는 계속 인간에게 문제 상황을 안겨주고 인간을 곤혹으로 이끈다. 결국 그는 산이 물이 되어 버리고 물이 산이 되어버리는 무차별의 空相으로 해탈, 초월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산이 물이고 물이 산인 그 웅혼한 무차별의 경지에서 또다시 해탈, 초월하여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인 현실로 되돌아 와야만 했다. 이 세계의 부조리와 저주에서 이 세계의 사랑으로 되돌아가는 대자대비(大慈大悲)의 현실긍정, 환색(幻色)의 세계의 대 긍정 이야말로 지고한 예술 경계(境界)인 것이다. (중략)

 여기서 위의 산과 물의 주어를 각각 화(畵)와 물(物)로 상정하여 서구미술의 변천과정을 유추해 보면 매우 흥미로운 논지(論旨)를 보게 된다.

1. 畵는 畵이고 物은 物이다.

2. 畵는 畵가 아니고 物은 物이 아니다.

3. 畵는 物이고 物은 畵이다.

4. 畵는 畵이고 物은 物이다.


박준구 / 無極 - 然 [치우(蚩尤)] / Oil on canvas / 91x116.8cm / 2010 / 개인소장

박준구 / 無極 - 然 / Oil on canvas / 90.9x60.6cm / 2011 / 개인소장

 畵와 物은 예술작품(image)과 사물(object,질료)과의 관계, 것(物, signifie, 內包)과 일(事, signified, signifiant, 外延)과의 관계, 넓게는 본체와 현상, 空과 色 ― [般若心經]에서 말하는 ‘色卽是空, 空卽是色’은 色(appearance)을 포용한 공(reality)이라야 眞空이요 空을 바탕으로 한 色이라야 眞有라는 卽相見生(나타난 모습에 즉하여 본래 모습을 본다)의 결론을 말한 것으로 실체와 속성, 실재와 현상의 이분을 허용치 않는 동양적 일원론의 최 극치라고 하겠다. ― 의 관계까지 포괄한다고 할 수 있겠다.

 1단계의 ‘畵’와 ‘物’은 아카데믹한 고전주의적 현상으로 사물의 외형을 모사, 재생(비례, 대칭, 질서에 의한 사물의 본질 탐구)하기에 급급했던 시대의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즉물적인 회화의 양식(樣式)은 본질적으로 대상 자체의 객체(object)를 그대로 드러내는 데는 여러 가지의 한계와 회의를 가져왔고, 그러므로 사물을 분석, 해체(deconstruction)하기에 이른다. (중략)

 ..... 합리주의, 개인주의적 세계관을 전면적으로 해체하고 새로운 삶의 양식을 준비하기 위해 일련의 구조(構造, Construction)분석이 가해진다. 인상주의를 필두로 다다, 초현실주의, 입체파운동, 추상표현주의, 앙포르멜 등의 절대적인 자유와 직접성의 추구로 이어지는 일련의 회화적 해체, 분석 작업은 더 이상 畵는 畵가 아니고 物은 物이 아니게 되는 딜레마에 봉착한다. 결국 말레비치의 침묵의 ‘백색’예술은 예술의 종말이란 양태를 도출하고 빈 캔버스로까지 지양한다. 여기에 진일보하여 마르셀 뒤샹은 ‘변기’(object, ready made)를 화랑에 제시하고 [샘]이라 명명하는 해프닝을 보이는데, 이는 畵가 物로, 物이 畵로 인지되는 3단계 과정의 대표적 상황이라고 할 수 있겠다. ..... 현대미술에서 나타나는 탈회화(脫繪畵)적 양식들이 오브제를 대상화 하려던 시도는, 도리어 허상의 증식과 잡음만을 허다하게 퍼뜨리고 말았다. 결국 오브제는 존재론이 꾸면 낸 하나의 신기루에 그치고 마는가, 아니면 사르트르(J.Sartre)의 말처럼 ‘것’과 ‘일’ 사이는 아무것도 없는 빈(無) 것이고 말 것인가, 그래서 것이 곧 것인 동시에 일이고, 일이 일이 되는 동시에 것이게 되는가. (중략)

박준구 / 無極 -流 / Acrylic on canvas / 72.7x50cm / 2008 / 개인소장

박준구 / 無極 - 流 / Acrylic on canvas / 72.7x50cm / 2008 / 개인소장

 이러한 인식은 고된 실험의 역경의 막바지에서, 다시 畵는 畵이고 物은 物인 현실의 한층 승화된 경지의 세계로 되돌아가야 한다. 훗설의 현상학적 환원(現象學的 還元)에서 언급하듯, 유럽 제 과학의 위기를 초래한 객관적 세계의 상정을 깨뜨리고, 다시 한 번 우리가 살고 있는 대로의 ‘生活世界’(Lebenswelt)로 환귀하여, 그곳에서의 세계경험을 기술하는 것이다. (중략)

 ‘정신을 터득한 후 형상을 버린다’(得意忘象), ‘정신이 전해져서 그림으로 드러난다’(傳神寫照), ‘마음을 맑게 하여 형상을 음미 한다’(澄懷味像), ‘만물이 정신에 부합된다’(物在靈府), ‘물상과 나 모두를 함께 잊는다’(物我兩忘), ‘몸이 대나무와 같이 하나가 된다’(身與竹化) 등의 동양 회화적 예술관이 표출된 연후에야 비로소 현세의 긍정적 예술경지에의 회귀가 가능할 것이다. 즉 자연주의적이고 현세적인 예술관의 정신성과 그 실천의지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역시 畵는 畵이고 物은 物이다. (중략)

 더 이상 예술이 예술로서만 이야기되어 지고, 예술을 위한 예술행위가 지속된다면 그 전망이 밝을 수는 없을 것이다. 산 속에선 산을 느낄 수 있지만 산을 볼 수 없고, 산 위에선 산을 볼 수 있지만 人間을 볼 수 없는 것이다. 삶과 예술, 현실과 이상 등의 원활한 소통과 합일이 이루어질 때 진정한 아름다움을 체득하게 되리라고 본다..... 』

 전술한 내용들과 위의 인용 문장에서 유추되는 내재적 함의는 그동안 작가 박준구가 구현하고자 하는 예술이 무엇인가? 라는 대명제에 한층 접안하기 용이하리라 본다. 그러나 자칫 이러한 논조나 서술이 오히려 그의 예술의지를 한 축으로 편협 되게 하거나, 예술 본연의 취지를 윤색시키는 결과가 도출된다면 안 될 것이다.

박준구 / 無極 - 流 / Oil on canvas / 72.7x50cm / 2011 / 개인소장

박준구 / 無極 - 流 / Acrylic on canvas / 53.0x45.5cm / 2010 / 개인소장

 다행히도 그는 인간과 소나무 외에도 연꽃, 매화, 오리, 물고기, 물, 낚시 등등의 소재로 확장해 가면서, 표현기법 또한 사실적인 기법만을 고집하지 않으면서 스스로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으려는 의지와, 자연과 인간의 이분법적인 접근이란 도식성(圖式性)에의 함몰을 지양하는 방법들을 곳곳에서 보여주고 있다. 또한 그의 작품과 이에 접근하는 사상적 기반이 다소 현실 도피적이고 지극히 이상적이기만한 환각에 빠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문제점 등도 기우(杞憂)인 듯하다.

 그림이란 시각 예술적 영역의 고유한 성격은 ‘보는 것’에 있다. 그림이 보여지는 것에 대한 충실함 보다는 담론, 또는 텍스트로 읽혀지기를 의도하거나, 안일하고 척박한 사상적 기반에 안주하거나, 과도한 상징이나 알레고리로 중무장해서 스스로의 난해함에 빠지게 된다면 다소 회의적일 수도 있다.

 예술다운 진정한 예술, 예술 본연의 순수한 아름다움과 깊은 내면의 성찰에서 우러나오는 감동적인 작품을 만날 때의 그 행복한 충만은 그 어떠한 값진 보배보다도 가치 있는 것이다. 아직도 詩가 쓰여지고 여전히 그림이 그려지는 이 시대에, 많은 이들이 행복 충만한 미소를 가득 머금기를 희망한다. 아울러 이 시대의 모든 예술가들에게 아낌없는 찬사와 경의를 표하는 바이다......

 ― 글 : 流河